일상,자기개발 등

(기록) 운동일지 : 아침 달리기 5.8km / 41분 / 449kcal

뜬구름홍 2024. 6. 24.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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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6.16부터 운동일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 운동 전, 중, 후 마음가짐 등에 대한 개인적인 내용입니다.

- 운동 종류 : 야외 달리기

- 거리 : 5.8km

- 느낀 점 : 어제는 달릴 수 없는 상황이라 - 괜한 핑계 - 오늘은 꼭 아침 달리기를 나서야만 했다. 주말 내내 안개가 끼고 습한 날씨였는데 오늘은 안개도 개고 햇볕도 쨍쨍해서 달리기에 이상적인 날씨였다.

 

게다가 중간중간 서늘한 바람이 내 몸을 감싸는데 여기가 대한민국인지 하와이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였다. - 개인적으로 하와이보다 저는 대한민국이 좋습니다^^ - 비록 하루 쉬었지만 7~8km를 달릴 마음은 없었다. 그렇게 달려도 되지만 '이곳'의 달리기 코스는 장거리에 그리 좋지 않은 것 같다. 중간중간 들쑥 날쑥한 오르막길과 내리막길로 인해서 호흡이 왔다 갔다 한다.

 

힘들게 오르막길을 달리고 나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체력들이 전부 바닥나는 기분이 든다. 그럴 때면 연료를 채워주어야 하는데 채워줄 연료가 없다. 언제나 나는 공복에 달리기를 나서기 때문이다.

 

오르막길 뒤에 찾아오는 내리막길에서는 최대한 무릎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촘촘 걸음으로 천천히 내려온다. 이 때 호흡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면서 심장의 고동소리를 균일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이런 코스에서 달리기를 뛰다가 평지의 길 좋은 탄천이나 한강 같은 곳을 달리면 2배 이상은 뛰는 것 같다. 혹시 몰라서 스스로 테스트해 본 데이터를 기반으로 말하는 것이다. 한 때 '이곳'에서 5km 달리기를 완주하고 난 후 길 좋은 탄천에서 달리기를 뛰어봤다. 결론은 10km 이상을 달렸다. 다리에 무리가 갔냐고? 무리는 갔다. 하지만 뛰는 도중에 엄청 힘들거나 - '이곳'의 오르막길을 막 달리고 난 직후의 호흡 - 애써 무릎에 신경 써서 촘촘히 내려갈 필요도 없었기에 오로지 달리기 코스와 나의 몸만 신경 쓸 수 있었다. 그 덕분인지 거리가 확실히 늘어났다.

 

당시 1km를 5분 30초 이내로 달렸으니 이러면 말 다한 거 아닌가? 9km 지점에서도 km 당 6분 30초가 안되었다. 훈련은 역시나 힘든 곳에서 해야 비로소 훈련인 것 같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달리는 코스 내내 여러 사람들을 마주쳤다. 대부분 30-40대 여성분들(과 자녀들)과 70대 이상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특히 이분들은 하나 같이 밝은 색 조끼를 맞춰 입으며 걸어다니시며 쓰레기를 주우신다. 자원봉사인지 환경미화원인지 잘은 모르겠다. 하지만 이분들 모두는 하나 같이 얼굴표정이 밝으시다.

 

출퇴근했을 당시 지하철에서 만나는 한 없이 우울한 표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과는 사뭇 다르다. 

 

5-6명이 열과 오를 맞추며 쓰레기를 주우며 내 쪽으로 걸어오신다. 우리의 목적지는 서로 반대방향이다. 왼쪽에 계시는 나이는 지긋해 보이지만 패션센스가 남다른 할아버지께서 전화를 하면서 걸어오신다. 잠시 통화내용을 엿들었는데 전화를 건 상대방이 그 할아버지에게 뭐 하고 있냐고 물어보신 것 같다. 이에 패션센스가 있는 할아버지는 목에 힘을 주며 "뭐 하고 있긴 일하고 있지!"라고 자랑스럽게 답을 하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70대 이상인 저 분들도 '일'에 대한 강한 무언가를 갖고 계신다. 반면에 그보다 훨씬 어린 나는 '일'에 대해 정말 약한 무언가를 갖고 있다. 어찌 이리도 차이가 나는 걸까. 둘 중에 누가 잘못된 것일까? 아니 잘못되기보다는 살아온 환경이 서로를 만든 걸까? 

 

나는 개인적으로 '일'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일본의 유명한 경영자가 쓴 책 '일은 왜 하는가?'라는 책도 읽어보고 '일이란 무엇인가?'라는 전공 서적 같이 두꺼운 책도 읽어봤다.

 

거기서 말하는 '일'의 공통점은 삶을 지탱해주는 것, 자아실현을 해주는 것, 나를 만나는 것 등의 얘기를 하는데, 나는 도통 공감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일이 그러한 의미를 갖고 있는 걸까?

 

그러한 감정을 느끼려면 내가 주인이 되거나 설령 일을 한다 할지라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결정하고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

 

문득 이어령 선생님의 '일'에 대한 챕터가 기억난다. 마지막 문장에 이어령 선생님은 본인은 정작 '일'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직장인이거나 자영업자나 그런 걸 해보지 않으셨던 분이다. 그러니 나처럼 일개로 살아오면서 느꼈던 '일'과 이어령 선생님의 한 없이 자유롭게 살면서 느낀 '일'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 권의 책을 읽으면서 - 일에 관련된 - 저자가 말하는 일과 내가 생각하는 일은 애초에 시작부터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일개미의 '일'을 싫어한다. 그래서 벗어나고 싶다. 태초부터 일의 정의를 바꿔보고 싶다. 저자들이 말하는 이상적인 '일'처럼 나도 해보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태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울해하지도 않는다. 나는 두 가지의 다른 '일'을 경험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일을 경험했기에 그 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장단점에 대해서도 쉽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태도를 갖췄다. 

 

어차피 이렇게 살아온 거 누굴 탓하랴. 나를 탓하는 편이 낫다. 잘못된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일'을 싫어할 뿐이다.

그것도 너무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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