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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책책) 힐빌리의 노래 : J.D. 밴스 - 챕터.1 (f. 힐빌리란 누구인가? 그리고 삶은 어떻게 연속되는가?)

뜬구름홍 2024. 11. 13.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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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안녕하세요. 뜬구름홍입니다.

 

세기의 부통령. J.D. 밴스의 인생 호 책인 '힐빌리의 노래'를 읽었습니다.

 

양이 꽤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2-3일 정도에 다 읽었네요. 그만큼 재미도 있었고요.

 

무엇보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미국 문화에서 힐빌리 사람들의 문화는 마치 한국의 집단 문화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힐빌리란 미국 백인 중에서도 하층민을 부르는 단어입니다. 할모, 할보(우리나라로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힐빌리식 애칭)를 통해 진정한 인생과 가치관 정립을 해온 J.D. 밴스.

 

그런 하층민 출신이 마약, 자살, 알코올 중독 등의 늪에 빠지지 않고 미국 아이비리그인 예일대를 졸업하고 변호사 일을 하면서, 현재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J.D. 밴스는 힐빌리의 노래라는 책을 통해 미국 사회의 최하층 단면을 필터 없이 알려줍니다. 동시에 비록 어렸을 적 안 좋은 기억과 부족했던 자신의 삶이 지금에서 보면 그 누구보다도 '행운아' 였던 아이라는 사실을 회고합니다.

 

그럼 미국 부통령이 된 J.D. 밴스의 회고인 '힐빌리의 노래' 바로 보시죠!

 

- 챕터. 1 -

 

(책 속에서)

 

나는 러스트벨트에 속하는 오하이오의 철강 도시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곳은 일자리와 희망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큰 폭으로 사라져가는 동네였다. 부모님과 나의 관계는 좋게 말해 복잡한데, 엄마는 거의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를 키워준 외조부모님은 고등학교도 나오지 않았고, 친척들까지 포함해도 우리 집안에서 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거의 없다.

 

통계적으로 나 같은 아이들의 미래는 비참하다. 운이 좋으면 수급자 신세를 면하는 정도고 운이 나쁘면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다. 자그마한 우리 고향 동네에서 작년에만 수십 명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나도 비참한 미래를 앞둔 아이들 중 하나였다. 고등학교 중퇴를 가까스로 면했고, 주변 사람들을 향한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망가지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최근에 알게 된 사람들은 아이비리그 출신이라는 간판과 직업만 보고서 내가 무슨 천재라도 되는 줄 안다.

 

(중략)

 

가난한 사람들의 인생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신적・물질적 빈곤이 자녀에게 어떤 심리적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른 사람들도 이해하길 바랐다. 우리 가족과 내가 마주했던 아메리칸 드림을 이해하길 바랐고, 신분 상승을 이루면 정말로 어떤 느낌이 드는지도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최근에야 깨달은 바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중략)

 

더 심각한 문제는, 일을 그르치고 나면 그때 가서 남 탓을 한다는 것이다. 인생을 주도할 만한 힘이 자신에게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기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현대 미국의 거시적인 경제 동향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모습이다.

 

(중략)

 

나는 주변에서 복지 여왕을 여럿 봐왔다. 몇몇은 내 이웃이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백인이었다.

 

(중략)

 

켄터키에서는 굳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 척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내 삶에 유일한 남자들이었던 할모의 남자 형제들과 제부들은 이미 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들에게도 잘 보이고 싶었느냐고? 물론 그랬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그분들을 좋아하는 척했기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중략)

 

할모는 의리를 저버리는 일을 혐오했으며 그중에서도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배신하는 짓이 가장 나쁘다고 믿었다.

 

(중략)

 

더 지나친 면도 있지만, 그 집은 잭슨의 산골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거의 전형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잭슨은 전체의 3분의 1에 달하는 인구가 빈곤층이며, 이는 그 지역 아이들의 절반가량을 포함하는 수치다. 게다가 빈곤선을 약간 웃도는 대다수의 잭슨 사람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이기도 하다. 약물 중독 문제도 유행처럼 번지며 뿌리를 내렸다.

 

(중략)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할부지, 할모니, 할배, 할매 등 조부모를 부르는 표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동네 사람들 외에 누군가가 자신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할모’ ‘할보’라고 부르는 걸 본 적이 없다. 할모, 할보는 오로지 힐빌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만 쓰이는 호칭인 것이다.

 

내가 우리 할모와 할보의 손자라는 건 두말 할 것도 없는 가장 큰 축복이었다. 두 분은 내게 사랑이 넘치고 안정적인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다른 애들이 부모로부터 얻는 삶의 교훈을 대신 내게 가르쳐주며 생의 마지막 20여 년을 보냈다. 두 분 다 내가 자신감을 갖고 정당하게 기회를 얻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게끔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중략)

 

그래도 할모와 할보는 땀 흘려 노력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믿었다. 두 분은 사는 게 녹록지 않다는 걸 알았으며, 무엇인가 이루려고 할 때 본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더 오랫동안 고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자의 변명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할모는 틈만 나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절대 자기 앞길만 높은 벽으로 막혀 있다고 생각하는 빌어먹을 낙오자처럼 살지 말거라. 네가 하고 싶은 일이면 뭐든 할 수 있단다.”

 

(중략)

 

예나 지금이나 우리 동네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을 보면 무조건 두 부류 중 하나라고들 생각한다.

 

첫 번째 부류는 행운아다. 이들은 부유하고 인맥이 좋은 집안 출신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삶이 정해져 있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는 실력파다. 이들은 타고난 두뇌 덕에 실패를 하려야 할 수가 없다. 미들타운에는 첫 번째 부류에 속하는 행운아는 거의 없기 때문에, 누군가 성공했다고 하면 그저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한다. 평균적으로 미들타운 사람들은 고된 노력을 재능만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중략)

 

이따금 개념이 이해되지 않으면 자책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 좌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뿌루퉁하고 있을 때마다 할보는 언제나 다가와 다시 한번 문제를 풀어보자며 나를 달랬다. 엄마는 평생 수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내가 글자를 알기도 전에 나를 도서관에 데려가 도서 대출 카드를 만들어주고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려주며 언제든지 어린이 책을 집으로 빌려올 수 있게끔 해줬다.

 

한마디로 내가 살던 동네와 지역 사회에 만연한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 집에서는 다른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가르침이 나를 구원했을는지도 모른다.

 

(중략)

 

할모와 할보는 내 가장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두 분은 내 숙제를 도와주기도 했고, 내가 바르게 행동하거나 어려운 과제를 끝마칠 때면 간식을 주며 나를 우쭐거리게 만들기도 했다. 날 지켜주는 수호자인 동시에 내가 아는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두 분은 어딜 가든 외투 주머니나 자동차 좌석 아래에 장전된 총을 준비하고 다니는 전형적인 힐빌리들로, 한마디로 내면에 괴물을 숨겨놓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중략)

 

얼마 지나지 않아 폭우가 청년을 덮쳤고, 천국에 간 청년은 신 앞에 섰을 때 자신의 운명에 이의를 제기했다. “제가 믿기만 한다면 절 돕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신이 대답했다. “내가 차도 보내고 배도 보내고 헬리콥터도 보내지 않았느냐. 네가 죽은 건 네 잘못이니라.”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것이 ‘할모록’이 담고 있는 지혜였다.

 

(중략)

 

엄마가 나를 찾아와 소변 한 통을 받아달라고 했던 날 아침에 할모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됐다. 전날 할모네 집에서 자고 일어나 등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 엄마가 미친 사람처럼 헐레벌떡 날뛰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간호 협회에서 간호사를 대상으로 불시의 소변 검사를 실시하여 이를 통과한 이들에게만 면허를 갱신해줬는데, 그날 아침에는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일과를 마치기 전에 소변 검사물을 제출하라고 통보했던 것이다. 할모의 소변은 십수 가지 처방 약물로 오염돼 있었으므로 엄마가 소변을 부탁할 사람은 나뿐이었다.

 

아들에게 소변을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치고는 너무나 당당했다. 엄마는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해서는 안 될 부탁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태도였다. 게다가 다시는 마약을 복용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깨놓고서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중략)

 

소변 사건은 할모에게도 마지막 지푸라기였다. 난리를 치른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할모는 내게 더 이상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앞으로 쭉 할모와 함께 살자고 했다. 엄마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엄마는 그저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 말을 엄마라는 역할로부터의 휴식이라고 받아들였다.

 

(중략)

 

가장 친한 친구들도 내가 할머니와 함께 산다는 걸 몰랐다. 주변에 전통적인 가족 형태를 이루고 사는 또래가 별로 없긴 했으나, 그중에서도 우리 집은 특히 비전통적이었다. 그리고 또 가난했다.

 

(중략)

 

누가 묻기라도 하면, 나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으며 우리가 병든 할머니를 모시고 있노라고 거짓말을 했다. 할모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고등학생 때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숨겼다는 게 지금까지도 후회로 남아 있다.

 

(중략)

 

그 시절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할모와 함께 지낸 3년의 세월이 나를 절망에서 구해냈다. 그때는 할모와 함께한 시간이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전혀 몰랐다. 할모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눈치 채지 못했으니, 우리가 서로 일생의 벗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 또한 알았을 리 없다.

 

(중략)

 

빈곤층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복지 제도를 악용하는지도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푸드스탬프로 구입한 탄산음료 두 상자를 현금을 받는 대가로 정가보다 저렴하게 되파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계산도 따로따로 해달라고 했다. 식품 값으로는 푸드스탬프를 내밀었고 술과 담배 값만 현금으로 지불했다. 나는 이 사람들이 계산대를 지나가면서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정부 보조금에 기대 사는 사람들이 나도 못 사는 휴대전화를 쓰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왜 돈을 벌면서도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중략)

 

할모는 가난한 산골을 벗어났다고 생각했으나, 경제적 빈곤에서는 벗어났을지언정 여전히 정서적 빈곤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할모의 노년기와 유년기가 섬뜩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걸까? 이웃에 사는 10대 소녀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물론 개천에서 용이 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중략)

 

그 책을 처음 읽었던 게 열여섯 살 때라서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논점을 파악할 수는 있었다. 수백만 인구가 공장에 취직을 하려고 북부로 이주하면서 공장 주변에 우후죽순 생겨난 지역 사회들이 초기에는 활기가 넘쳤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공장들이 문을 닫자, 남겨진 주민의 발이 묶였고, 시에서도 더 이상 그렇게 많은 인구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했다.

 

교육 수준이 높거나 부유하거나 인맥이 좋은 사람 대부분은 가난한 이들만 남겨진 지역 사회를 뒤로하고 다른 동네로 떠났다. 동네에 남아 스스로 적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연줄의 혜택이나 사회적 지지를 거의 받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을 ‘실로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중략)

 

우리는 어릴 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부모가 됐을 때도 자녀들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는다. 자녀들의 학교 성적은 형편없다. 성적을 핑계로 화를 내는 일은 있지만, 자녀가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집을 평화롭고 조용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없다.

 

(중략)

 

청소년기 아이들은 대개 어떤 친구와 어울리지 말라는 어른의 지시를 무시하지만, 그건 지시를 내리는 어른이 보니 밴스 여사 같지 않아서일 거다. 할모는 만약 내가 금지 목록에 있는 친구와 놀고 있는 꼴을 본다면, 그 즉시 친구를 차로 받아버리겠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고서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할미가 그랬다는 건 아무도 모를 거야.”

 

(중략)

 

그렇게 나는 3월 말 어느 토요일에 신병 모집소를 찾아가 징모관에게 해병대에 관해 물었다. 징모관은 나를 설득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월급은 쥐꼬리만 할 것이고 전쟁에 나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래도 통솔력을 기를 수는 있을 걸세. 전역할 즈음이면 기강이 선 청년이 되어 있을 거야.”

 

(중략)

 

훈련소를 마친 직후에 이런 경험을 꽤 많이 했다. 해병대원이 되고서 처음 며칠간은 계속 미들타운에 있었는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누군지 일일이 설명해야 했다. 20킬로그램이나 살이 빠진 탓에 지인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훗날 내 결혼식에 들러리를 서준 친구인 네이트는 동네 쇼핑몰에서 내가 손을 내밀자 깜짝 놀라 멈칫거리기까지 했다. 어쩌면 내 행동이 전과 달라져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내 오랜 고향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중략)

 

그전까지 나는 늘 세상에 분노를 품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에게 화가 나 있었다. 학교에 갈 때 다른 애들은 친구들끼리 차를 타고 가는데 나는 버스를 타야 해서 화가 났고, 내 옷이 아베크롬비에서 산 게 아니라서 화가 났고, 우리 할보가 돌아가셔서 화가 났고, 좁은 집에 살아야 해서 화가 났다.

 

(중략)

 

그때 나는 누군가 지우개를 건넬 때 미소 짓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만족할 만큼 이뤄내지는 못했지만, 그날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노력조차 하지 않았을 테다.

 

해병대 복무 중 내 인생을 바꿔놓은 또 다른 계기는 한 가지 사건이 아니다. 무시무시한 훈련 교관과 케이크 사건을 겪었던 첫날부터 제대명령서를 받아들고 집으로 달려간 마지막 날까지, 해병대는 내게 어른답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책을 읽으면서 웃기도 하고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습니다.

 

저 또한 유년 시절이 그렇게 밝지는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힐빌리처럼 마약, 알코올중독, 욕, 싸움 등이 매일 같이 일어나는 동네에서 자란 건 아닙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 탈 없이? 자라게 해준 부모님과 형제 그리고 친구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네요)

 

제게는 밴스처럼 할모, 할보가 없습니다. 일찍이 돌아가셨기도 하고 살아계실 때는 명절 때 말고는 같이 있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가장 제 기억에 많이 남는 할머니가 그립습니다. 하늘나라에 계신 할머니.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아버지가 먼저 장례식장에 가 계셨습니다. 저는 퇴근을 하고 늦은 저녁에 장례식장을 갔는데 아버지의 눈이 붉어져있는 상태로 눈물 흘리면서 저를 맞이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렇게 강해 보이는 아버지가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여린 사람이 되었던 날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저희 부모님은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아픈 곳은 있지만) 책을 읽으면서 언젠가는 저 또한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맞이하게 될 날이 올 것이고 그걸 잘 이겨낼 수 있을지 문득 생각을 해봤습니다.

 

생각을 하다가 중간에 생각 고리를 끊고 '현재에 집중하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지 말고 최대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자'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힐빌리의 노래. 밴스라는 인물은 부통령이 왜 되었는지 어느 정도 감이 옵니다. 확실히 평범한 우리네가 모르는 미국 사회의 단면을 저자의 인생사와 글을 통해 너무나도 감동적이면서 쉽게 전달해 줬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 깜냥이 되지는 않지만 - 저 또한 밴스 부통령처럼 저만의 자서전 & 회고록을 써서 저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 응원의 한 줄을 건네주고 싶네요.

 

* 아참, 제 스펙은 전형적인 흙수저입니다.

- 지방대

- 야간 대학원

- 토익 800점 대지만 이것도 미친 듯이 노력해서 얻은 점수

- 대학을 나오지 않은 부모님

- 평범하지 않았던 학창 시절 (그렇다고 나쁜 길로 가지는 않았습니다. IMF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 잠시 잠식 당했을 뿐...)

 

그럼에도 지금까지 잘 먹고 결혼도 하고 아기도 키우고 있으며 주식 투자도 꽤 큰돈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10년 전의 제가 바라던 삶 그 이상을 누리고 있는 것 같네요.

(물론 주식 손실이 꽤 큽니다만... 오늘 자로 -1억은 되어 가네요 ㅎㅎ)

 

삶에 지치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재미 삼아 '힐빌리의 노래' 읽어보시면 용기가 생길 겁니다.

 

그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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