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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책책)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 : 김누리 교수(f. 삶의 의미를 재정의 해보다. 나는 노예가 되기 위해 태어났는가?)

뜬구름홍 2024. 7. 22.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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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안녕하세요. 뜬구름홍입니다.

 

도서관 신작 코너에서 해당 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조금은 자극적인 책 제목...

 

교육은 야만이라니...

 

호기심에 1-2페이지 읽어봤는데, 어머나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알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부정당하는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도대체 나는 무얼 위해 학교를 다니고 교육을 받고 시험을 쳤는가?

 

나는 생각이란 것을 할 줄 아는 사람 - 동물 - 인가?

다행히 저는 2015년부터 외국계 기업을 다니면서 퇴근길에 항상 생각을 곱씹어봤습니다.

 

이게 나의 길인가

이게 최선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등등

 

당시에는 답을 내리지 못했던 질문들이 비로소 지금에서야 하나 둘 답이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물론 꼭 답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 대략적인 방향만이라도 올바르게 맞춘다면 답은 따라오기 마련이거든요.

 

답보다는 방향을 믿습니다.

 

그럼 바로 보시죠!

 

(책 속에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의료 상황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의사 수가 가장 적은 나라에 속합니다. 2022년 기준 한국의 의사 수는 인구 1,000명당 2.1명으로 OECD 국가 중 꼴찌입니다.(한의사를 포함할 경우 2.6명으로 OECD 국가 중 꼴찌에서 두 번째입니다)

OECD 평균 의사 수가 3.7명이니, 이에 비해 1명 이상이 모자란 것입니다. 여러분, 1명이 부족하다고 하니 마치 별것 아닌 듯이 느껴지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 통계의 마술입니다.

 

1,000명당 1명이 부족하다는 것인데 우리나라 인구가 5천2백만명 정도이니까, 약 5만 2천 명이 부족한 것입니다. 적지 않은 숫자이지요. 독일의 경우 4.4명으로 우리의 2배가 넘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의료진 수를 늘린다고 발표했을 때 정말 반가웠습니다. 적어도 3만 명은 늘리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발표한 수치는 고작 1년에 400명씩 10년 동안 4천 명을 늘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수치만으로도 실망스러웠습니다.

 

(중략)

 

[어린 왕자]로 잘 알려진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현실적인 조건 때문에 보석 같은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살해당한 모차르트’라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교실에서 얼마나 많은 천재가 교살되었을까요? 이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중략)

 

한국에서는 모든 것을 골고루 잘하는 학생을 모범생, 우등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학생들이 스카이에 가는 거지요. 천재는 스카이에 가기 힘듭니다. 실제로 제가 4년간 서울대에서 가르치면서 만난 학생들 중에서 ‘아, 이 아이는 천재구나’하는 느낌을 받은 학생은 거의 없습니다. 경이로운 수준의 강박적 성실성을 가진 학생들은 많이 보았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성실할 수 있을까 놀라면서, 한편으론 이 ‘착한’ 아이들에게 너무도 안타까운 심정이었습니다.

 

(중략)

 

가장 결정적인 시험이라고 하는 대학입학시험을 기계가 채점하는 나라는 선진국 중에서는 한국이 유일합니다. 이것은 야만이지요. 이런 평가 방식은 교육의 내용을 공동화하고 황폐화합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사유할 수 있는 일체의 공간을 빼앗기게 됩니다. 사유가 없는 단순한 지식 조각들을 머릿속에 많이 저장하고 있는 아이를 모범생이라고 부르는 교육은 100퍼센트 ‘반교육’입니다.

 

서울대 학생 중에서도 학점이 높은 우등생 그룹이 있다고 합니다. (중략) “그렇게 높은 학점을 받은 비결은 무엇인가요?”라는 물음에 응답자의 87퍼센트가 “교수님이 얘기하시는 걸 콤마 하나 빼놓지 않고 그대로 받아 적어요. 요약하는 게 아니라 교수님 말씀을 완성된 문장 그대로 똑같이 적는 거예요. 단어 그대로 똑같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중략)

 

또한 자본이 원하는 이상적인 노동자는 누구일까요? 자본은 개성 없는 소비자뿐만 아니라, 개성 없는 노동자를 좋아합니다. 자본의 입장에서 개성은 ‘오류 가능성’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자본이 바라는 이상적인 노동자는 군소리 없이, 비판 없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인간입니다. 사유하지 않고, 지배자가 정답이라고 정해준 것을 잘 고르는 인간입니다. 바로 한국 교육이 그런 인간을 길러내고 있습니다.

 

(중략)

 

그래서 주말에 방에 혼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았죠. ‘나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내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이 없다’라는 사실 말이에요.

 

(중략)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경쟁’이 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며, 때로는 놀라운 생산성을 가져오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경쟁을 교육의 핵심적인 원리로 적용합니다.

(중략)

이 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이 마치 진리인 양 우리의 머릿속에 새겨넣은 관념이라는 말이지요.

 

(중략)

 

독일 학생들이 ‘안다’고 말할 때는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자기 나름의 경험으로 해석된 얘기들을 하는 것이었죠. 제가 단테를 안다고 했을 때, 과연 제가 단테에 대해 할 수 있는 얘기가 무엇이고, 단테가 저에게 준 의미는 무엇인지, 제게는 그런 차원의 성찰이 없었던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그저 언제 사용할지도 모를 수 많은 ‘죽은 지식’을 머릿속에 쌓아가는 과정을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교육은 스스로 사유하는 능력을 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시하는 것이 바로 책 읽기입니다.

 

지식을 가능한 많이 머리에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의 책들을 천천히 깊게 읽고 사유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독일 교육의 기본입니다.

 

(중략)

 

"내가 실력이 없어서 서울지검에 못 간 거 아니야."

"내가 실력이 없어서 대치동에서 개업 못한 거 아니야." 이 리스트는 끝없이 이어집니다. 이런 말은 어떤 심리에서 나온 것일까요. 소위 출세했다는 사람들마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패배자'라는 자기규정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한 국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 늘 자기 위에 누가 있고, 자기 밑에 누 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제주지검'의 검사는 서울지검'에 있는 검사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중앙대학교 교수는 서 울대학교 교수보다 처진다고 생각하는 식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 든 한국인들이 특정한 열등감을 내면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저는 한국인의 성격에 잘못된 무언가가 내 면화된 것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사회 구성체에 어떤 문제가 있다 고 생각했습니다. 즉 한국 사회는 기본적으로 그 구조가 수직•위 계적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 간의 관계도 수직• 위계적이기 때문에, 그 구성원들도, 심지어 기득권자들마저도 이런 수직• 위계적 관점을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요.

 

(중략)

 

자기착취는 더욱 정교하고 악랄한 착취입니다. 노예 감독관의 착취는 심해지면 착취당하는 자의 내면에 저항의식이 싹니다.

이것이 축적되어 폭발하면 혁명의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방의 역사가 곧 인류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착취의 경우에는 착취가 심해져도 착취당하는 자의 내면에 저항의 식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의식이 커져갑니다. 내가 게을러서 안 되는 거야 내가 공부를 안 해서 망한 거야 '내가 너무 많이 놀았어'라면서 죄의식만 쌓이는 것입니다.

 

(중략)

 

최근의 사례를 하나 더 보겠습니다. 2020년 9월 초에 그리스에 있는 시리아 난민촌에서 화재가 났습니다. 그 화재로 당시 수용소에 있던 1만 5천 명의 시리아 난민이 잘 곳을 잃고 비참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 난민들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곳이 독일 정부였습니다.

 

9월 15일 독일 정부는 난민 2,700명을 먼저 수용하겠다고 발표합니다. 이 발표가 있고 닷새 후에 독일의 40개 도시에서 수만 명이 정부의 정책에 항의하여 거리로 쏟아져 나옵니다.

 

이들은 도대체 무엇에 항의하는 것일까요? 왜 난민을 받느냐고 항의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왜 난민을 ‘모두’ 받지 않느냐고 항의하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중략)

 

“아이의 자연스러운 성을 도덕적으로 억압하는 것은 불안하고, 소심하고, 복종적이고, 권위를 두려워하는 아이, 세상 말로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아이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인간의 저항능력을 마비시키고, 성적인 사유를 금지함으로써 사유 일반을 억압하고, 비판능력을 거세한다."

(중략)

그런데 한국에서는 성과 관련해서 ”애들은 몰라도 돼, 알아선 안 되지 “라는 식으로 사유 금지가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중략)

 

이런 무책임한 어른을 믿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제 젊은 세대에게는 한 가지 방편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 어른들을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대체하는 것이지요. 여의도도 젊은 세대로의 거대한 세대적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습니다. 젊은 세대의 미래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어른들을 더 이상 믿지 말고 청소년과 청년이 스스로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 청년들에게는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있습니다.

 

(중략)

 

이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병든 사회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유한 부모를 가진 아이들만 공부에 매진할 수 있고, 가난한 학생들은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닙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좋다고 하는 것은 대체로 좋지 않은 것입니다. 기득권 계급의 지배에 유리한 것을 대개 좋다고 말하지요.

아르바이트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르바이트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심지어 아르바이트를 하면 '철이 들었다고 칭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여러분의 젊은 시간은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가 될까요? 시간당 1만 원, 혹은 2만 원? 여러분의 젊은 시간은 도저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크으... 어땠나요?

정말 충격을 제대로 먹었습니다.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대략적으로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과대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의 생각은 책을 읽는 사람만큼 존재하니깐요.

 

이런 책도 있고 이런 시각도 있구나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공감 가는 내용이 많아서 참... 씁쓸했다는!)

 

더 나은 대한민국이 될 거라 믿습니다^^

 

그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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