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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책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무라카미 하루미 (f. 달리기와 글쓰기 그리고 인생을 논하다)

뜬구름홍 2024. 10. 12.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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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안녕하세요. 뜬구름홍입니다.

 

올해 6월부터 현재까지 저만의 달리기를 블로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작년 11월부터 달리기를 시작하긴 했지만 말이죠)

 

달리기에 재미를 느끼다보니? 관련한 책들이 있나 찾아봤습니다.

 

다양한 달리기책이 시중에 나와있더군요.

 

그중에 유난히 제 시선을 끌어당겼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 책.

 

고민을 좀 하다가 별 기대 없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는 내내 러너로서의 갖는 생각과 고민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상되는 여러 가지들이 참으로 공감되고 재밌었습니다.

 

달리기라는 운동은 참 묘합니다.

적당한 운동화와 도로만 존재하면 준비 끝입니다.

 

딱히 무언가 준비할 것도 없습니다. (옷 입기와 신발 신기 그리고 약간의 스트레칭 정도)

 

이렇게 가벼운 준비성에도 불구하고 달리기는 참으로 어렵고 또 그로 인해 끝까지 달리고 나면 성취감이 엄청난 운동입니다.

 

세계 어디서나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체력과 열정만 있으면 단기간에 가장 큰 성취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운동.

 

'달리기'

 

한 번 도전해보는 건 어떨까요?

 

서론이 길었네요 ㅎㅎㅎ 그럼 바로 보시죠!

 

(책 속에서)

 

다시 말하면 끝까지 달리고 나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혹은 프라이드와 비슷한 것)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장거리 러너에게 있어서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똑같은 경우를 일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소설가라는 직업에 - 적어도 나의 경우라는 전제하에 하는 말이지만 - 이기고 지고 하는 일이란 없다. 판매 부수나, 문학상이나, 비평을 잘 받거나 못 받거나 하는 일은 뭔가를 이룩했는가의 하나의 기준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본질적인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자신이 쓴 작품이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도달했는가 못했는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며, 그것은 변명으로 간단하게 통하는 일이 아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뭐라고 적당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

(중략)

여느 때보다 더 긴 거리를 달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만큼 자신을 육체적으로 소모시킨다. 그리고 나 자신이 능력에 한계가 있는 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식한다.

가장 밑바닥 부분에서 몸을 통해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긴 거리를 달린 만큼, 결과적으로는 나 자신의 육체를 아주 근소하게나마 강화한 결과를 낳는다.

화가 나면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 분풀이를 하면 된다.

분한 일을 당하면 그만큼 자기 자신을 단련하면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말없이 수긍할 수 있는 일은 몽땅 그대로 자신의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되도록이면 그 모습이나 형태를 크게 변화시켜) 소설이라고 하는 그릇 속에 이야기의 일부로 쏟아 붓기 위해 노력해 왔다.

(중략)

소설가가 되려는 것과 같은 야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나로서는 무엇이 어떻든 간에, 아무 생각 없이 소설이라는 것을 쓰고 싶었다.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이미지도 없이 ‘지금이라면 뭔가 나 나름대로의 의미 있는 그럴듯한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하고 느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서, ‘자, 뭔가를 써야지’ 하면서 알게 됐지만 나는 제대로 된 만년필 한 자루도 갖고 있지 않았다. 신주쿠의 기노쿠니야 서점에 가서, 원고용지 한 뭉치와 1,000엔 정도의 세일러 만년필을 사 왔다.

참으로 조촐한 자본 투자였다.

(중략)

그래서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게의 권리를 모두 양도하고, 약간 겸연쩍기는 했지만 ‘소설가’라는 간판을 걸고 살아가기로 했다.

“어쨌든 2년 간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줘. 그래서 안 된다면 또 다른 데서 작은 가게를 열면 되지 않겠어? 아직 젊으니까 다시 시작할 수도 있잖아”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좋아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 당시에는 빚도 꽤 남아 있었지만, 뭐 어떻게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것이 1981년의 일이다.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보자.

(중략)

그래서 나는 스포츠 종목으로, 거의 망설임 없이 - 혹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 달리기를 선택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담배를 끊었다. 매일 달리게 되면, 담배를 끊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금연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지만 담배를 피우면서 달리기를 매일 계속할 수는 없다.

‘더 달리고 싶다’는 자연스런 욕구는 금연을 계속하기 위한 중요한 동기가 되었고, 금단현상을 극복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담배를 끊는 것은 이전 생활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상징 같은 것이었다.

(중략)

제 4 장

나는 소설 쓰는 방법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

(중략)

나는 원래 고갯길은 그리 어려워하지 않는다. 코스에 오르막 길이 있으면 거기에서 다른 주자를 추월할 수 있기 때문에 평소라면 오히려 환영을 할 정도지만, 그래도 센트럴파크의 마지막 언덕길은 언제나 나를 맥 빠지게 만든다.

마지막 몇 킬로를(비교적) 즐겁게 달리고 전력 질주해서 웃으면서 골인하고 싶다. 그것이 이번 레이스의 목표 중 하나다.

(중략)

그러나 시간만 충분히 들여 실행하면, 그리고 단계적으로 일을 진행해 나간다면 군소리도 안 하고(때때로 얼굴을 찌푸리기는 하지만) 강한 인내심을 발휘해서 그 나름의 고분고분한 자세로 강도를 높여 나간다. 

‘이만큼의 작업을 잘 소화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기억이, 반복에 의해서 근육에 입력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의 근육은 무척 고지식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이다.

(중략)

그녀들은 한눈에 봐도 우수하고 건강하고 매력적이고 진지하며, 그리고 자신에 대한 확신에 차 있다. 그녀들의 달리기는, 많은 경우 아무리 봐도, 장거리에 적절한 주법은 아니다. 전형적인 중거리 러너의 주법이다. 

보폭은 크고, 발차기는 예리하고 강하다. 주변의 풍경을 보면서 느긋하게 달리는 것은 아마도 그녀들의 정신 상태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그에 비하면 나는, 내 자랑을 하는 건 아니지만, 지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 

세상에는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산만큼 있고,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산더미처럼 있다.

(중략)

어쩌면 결국에는 이렇게 단정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마 인생이 아닐까,라고. 우리는 아마 그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송두리째, 이유도 모른 채 그 어떤 경위에도 아랑곳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세금이나 조수의 간만, 존 레논의 죽음과 월드컵의 오심과 마찬가지로.

(중략)

중요한 것은 시간과의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만큼의 충족감을 가지고 42킬로를 완주할 수 있는가, 얼마만큼 자기 자신을 즐길 수 있는가, 아마도 그것이 이제부터 앞으로의 큰 의미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나는 즐기며 평가해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약간 다른 성취의 긍지를 모색해 가게 될 것이다.

나는 기록에 도전하는 무심한 젊은이도 아니고, 한낱 무기적인 기계도 아니다. 한계를 알면서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오래 자신의 능력과 활력을 유지해가려 하는, 한 사람의 직업적인 소설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중략)

무릎이라는 것도 때로는 불평을 하고 싶을 것이다. “거칠게 콧김을 내뿜으며 뛰는 것도 좋지만 조금쯤은 내 생각도 해주세요. 한 번 못 쓰게 되면 대신할 것이 없잖아요”라고.

이전에 이처럼 무릎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게 도대체 언제였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무릎에게 약간 미안한 생각이 든다.

확실히 그렇다.

코로 숨을 쉬는 건 얼마든지 대체할 것이 있지만 무릎은 대체할 것이 없다. 지금 있는 것으로 죽을 때까지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소중히 다루어야만 한다.

(중략)

아무튼 레이스에 출장해서 완주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골인하는 것, 걷지 않는 것, 그리고 레이스를 즐기는 것. 이 세 가지가 순서대로 내 목표다.

(중략)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내가 좋아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좋아서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

설사 다른 사람들이 말려도, 모질게 비난을 받아도 내 방식을 변경한 일은 없었다. 그런 사람이 누구를 향해서 무엇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중략)

나는 이제부터 1.5킬로를 헤엄치고, 40킬로를 자전거로 주파하고, 10킬로를 달리려 하고 있다. 이런 일을 해서 뭐가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바닥에 작은 구멍이 난 낡은 냄비에 부지런히 물을 붓는 것과 같은 일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중략)

만약 심신의 단련에 필요한 고통이 없다면 도대체 누가 일부러 트라이애슬론이나 풀 마라톤이라고 하는, 노력과 시간이 걸리는 스포츠에 도전할 것인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고통을 통과해 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에서 자신이 살고 있다는 확실한 실감을, 적어도 그 한쪽 끝을, 우리는 그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의 성질은 성적이나 숫자나 순위라고 하는 고정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 속에 유동적으로 내포되어 있다는 인식에(잘 된다고 하는 가정이지만) 다다를 수도 있다.

(중략)

장거리 레이스가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많든 적든, 좋든 나쁘든) 키워주고 만들어왔던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한 나는 앞으로도 장거리 레이스적인 것과 더불어 생활을 하고, 함께 나이를 먹어가게 될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 - 이치가 닿는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 인생일 것이다.

아니,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다른 선택을 할 만한 여지도 없는 것이다.

자동차의 핸들을 쥐면서 문득 그런 것을 생각했다.

(중략)

그렇게 해서 계절이 순환하고 해가 바뀌어 간다. 나는 또 한 살을 먹고 아마도 또 하나의 소설을 써가게 될 것이다.

어쨌든 눈앞에 있는 과제를 붙자고 힘을 다해서 그 일들을 하나하나하 이루어 나간다.

한 발 한 발 보폭에 의식을 집중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동시에 되도록 긴 범위로 만사를 생각하고, 되도록 멀리 풍경을 보자고 마음에 새겨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장거리 러너인 것이다.

(중략)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 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 - 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되도록 구체적으로 - 교훈을 배워 나가는 것에 있다.

(중략)

서문에서도 썼던 것을 되풀이 하는 모양새가 되지만, 나로서는 ‘달린다’는 행위를 매개로 해서 내가 이 사반세기 남짓한 세월 동안을 소설가로서, 또 한 사람의 ‘어디에나 있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나 나름으로 정리해보고 싶었다.

(중략)

내 경우, 이렇게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까닭은 ‘소설을 착실하게 쓰기 위해서 신체 능력을 가다듬어 향상한다’라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므로 레이스나 연습을 위해서 작품을 쓸 시간을 빼앗겨버리고 나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라고 할까, 약간 곤란한 일이 되고 만다.

그런 이유로 현재로서는 비교적 온건한 단계에 나 자신을 머물게 하고 있다.

(중략)

*아래는 역자 후기입니다.
(중략)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저자가 이 책의 맨 끝에 만약 자신의 묘비명을 직접 쓸 수 있다면 ”작가 겸 러너“ 로서 ”적어도 최후까지 걷지는 않았다 “고 남기고 싶다고 말한 부분이다.

여기만 봐도 그가 소설가란 직업과 마라톤 주자라는 사실을 똑같은 비중으로 여기고, 특히 마라톤 주자라면 때로는 끝까지 달리지 못하고, 도중에 걷기도 하는 일이 흔히 있지만 자신은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는 것을 일생의 가장 자랑스럽고 만족한 일로 여겨왔음을 짐작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처럼 소중히 여기는 문학과 마라톤을 생애의 가장 중요한 성취요 덕목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중략)
...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마음가짐과 실천의 지표가 필요한가를 일깨워주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하루키는 달리기는 글쓰기 위해 체력을 유지시켜주고 영감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뜬구름홍의 달리기는 주식 투자를 위해 체력을 유지시켜주고 생각을 정리하고 나와의 싸움에서 고뇌하는 것이라고.

 

달리기는 인생과도 같고 동시에 개개인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얻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생각합니다.

 

모든 운동이 그러하겠지만 유난히 달리기는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헬스 자격증을 딴들 헬스에 미쳐서 몸을 혹사한들,

또는 요리 자격증을 준비하면서 요리에 미쳐서 온 신경을 칼 날에 집중한들,

 

달리기만큼의 고통과 희열을 주는 행위는 딱히 달리기 말고 찾아보기는 힘든 것 같네요.

 

저의 투자가 멈추지 않는않은 한 달리기도 멈추지 않을 예정입니다. (몸이 아프지 않는 한)

 

그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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